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차 호법운동 (문단 편집) === 광저우 수복 === 강서성으로 퇴각했던 쉬충즈는 9월 말, 연평에 주둔한 [[북양군벌]] 왕영천과 연합하여 복건성으로 진주, 10월 12일 푸저우를 점령했다. 쑨원은 북벌군을 동로토적군으로 개칭하고 쉬충즈를 총사령관에, 장제스를 참모장에 임명하여 천중밍을 토벌할 것을 지시했다. 푸저우에서 전열을 정비한 동로토적군은 12월 19일, 천주를 함락시켜 복건을 완전히 평정한 후 광저우로 진군하였다. 광서의 계계군벌 유진환, 운남의 전계군벌 [[양시민]] 등이 토적군에 참가하면서 서로토적군이 구성되었고 12월 말, 서로토적군이 오주를 함락시켰다. 1923년 정월, 쑨원은 <중국 국민당 선언>을 발표하여 "호법과 비법의 싸움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둘 때까지 결코 전진을 그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1월 9일, 토적군이 조경을 함락시켰고 10일에 삼수를 점령했다. 삼수가 함락되면서 궁지에 몰린 천중밍은 그날로 하야를 통전하고 혜주로 물러가면서 토적군이 1월 10일에 광저우에 입성하여 7개월 만에 광저우를 수복했다. 이를 2차 호법전쟁이라고도 한다. 1923년 2월 21일 광저우로 돌아온 쑨원은 3월 2일 대본영을 발족하고 세번째로 광동정부를 조직하였다. 쑨원과 우호관계에 있던 [[중국 공산당]] 총서기 [[천두슈]]가 선전주임에 취임하여 광동정부 안정화에 착수했다. 4월 16일 광서군벌 심홍영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운남, 광서, 광동 연합군에게 진압당했다. 5월 9일 북강 일대를 혁명군이 장악하면서 심홍영은 서강으로 패주했다. 같은날 근성 넘치게도 천중밍이 용문을 점령하고 석룡으로 진격하여 매현, 조주, 산터우를 함락하여 광동 동부를 장악했다. 5월 20일 혁명군이 혜주를 공격했으나 천중밍이 혁명군의 배후를 습격하면서 혁명군을 괴롭혔다. 쑨원이 직접 전선에 나서서 독전했으나 이미 병사들은 석룡이 함락되었다고 외치면서 패주하고 있었다. 이에 쑨원은 200명의 경위대를 조직하여 천중밍 부대가 이미 궤멸당했다는 소리를 지르게 했다. 이에 병사들의 사기가 회복되어 석룡을 사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천중밍의 세력 자체는 완전히 근절된 것이 아니라 1925년 2차례의 [[국민당의 1차 동정|동]][[국민당의 2차 동정|정]]이 실시된 후에야 축출하고 광동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